Jongho Park: Promise in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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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시작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자신이 선호하는 포털 사이트를 바라본다. 그 하나의 화면 안에서 외산 자동차의 신차 발표 소식과 어느 노부부의 생활고로 인한 자살 소식이 아래위로 나란히 한 줄의 공간을 차지하며 동등하게 실려 있음을 보게 된다. 삶의 치열한 현장과 눈물 나도록 감동스러운 인생 역경을 다룬 TV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시원한 맥주 캔을 들고 춤추는 광고를 보며 순식간에 자신이 느낀 감동을 뒤로 한 채 목마름의 욕구에 매몰되어 냉장고 문을 열게 될지도 모른다. 현대는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것을 긍정하고 공정하게 표현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모든 것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를 지배한다. 이 속에서 개인은 사회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을 안게 된다. 결과적으로 지각의 과잉 상태에서 개인은 적응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느라 자신이 내던져진 비극일지 모르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관조하고 사유할 시간과 공간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예술가들 또한 현대 예술의 특성상 부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긍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오류를 피하고자 객관화한 작가의 정서는 지나치게 많은 공통분모를 억지스럽게 만들어 내는데, 일례로 망설임과 거부의 논쟁조차 오묘한 합의를 보며 결국엔 한 형제임을 확인한다. 예술은 더 이상 정신의 자유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정신이 지닌 예속적 의존성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기존 상황을 넘어서거나 집단성과 출생 등이 갖는 힘을 꺾어버려 무력화시킬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현시대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변화의 시작을 기도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부조리와 대면하는 인간상은 무자비하고 비극적인 운명으로부터 추구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고귀하고 가장 용감한 인간을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운명에 의해 삶이 파멸될 때라도 그 부조리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로부터 고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작업은 작가가 대면하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평범한 무관심과 무감각한 의식의 세계로의 안일한 복귀를 거부하는 의지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 가득 찬 놀이동산으로 변해버린 문화 속에서 모든 것이 화려해서 특별히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 자유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나 특별한 가치를 찾아내고자 하는 행위이다.

내 안의 약속.

30여 회가 넘는 이사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살아온 나는 장소성에서 기인한 정체성조차 확립할 수 없었던 떠돌이로서, 그저 외부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시간을 사는 어색한 생명체였다. 타인들이 어떻게든 견디는 부유하는 실존의 느낌도, 살아가려면 안주할 수밖에 없는 통제의 시스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자아만큼이라도 확립하려는 욕망이 너무나 커져 버린 탓으로도 볼 수 있다. 현실과의 괴리감은 불안과 허무를 동반했다. 불안은 떨쳐내야만 했다. 하지만 허무는 조용히 나를 따르도록 놔두어야만 했다. 그 속에서 존재에의 의문과 사유가 시작되었고, 다시금 빛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있는 의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는 패배할 운명일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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