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ungyea Park

psy1

이름 : 박승예

현재 거주지 : 분당

태어난 곳 : 서울

아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

잘 하는것, 하고싶은 것을 해오며 자연스럽게 이 길을 걸어온 듯 하다. 1남1녀의 둘째로 자랐는데,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실 때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과 지와 사랑의 ‘골드문트’의 캐릭터에서 뜻을 따오셨다고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으로서 예술이 나의길이 되기를 희망하신 것이다. 그림 그리는것을 좋아하고 이것을 나의 길로 택하여 살아가는것에 대하여 부모님들이나 가족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주어왔던것도 큰 영향이 아닐까 한다. 아버지역시 사진과 글 작업을 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셨다.

추구하는 작업 스타일

예술을 통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겠으나, 개인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화가’로 정의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자체를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것인가의 구상의 과정역시 중요한것이 사실이지만 그린다는 ‘행위’의 부분이 내게는 가장 절실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 OR 전시는 무엇인가요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전시라는 부분은 내게 어떤 반복적인 이벤트의 느낌이상으로 와닿지는 않는다 (아직). 보다는 각기의 그림들을 그려내는 행위의 과정들이 더 강렬한 편인데 굳이 꼽자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행하였던 개인전이 아닐까 싶다.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내가 재학하였던 대학은 졸업을 위한 필수의 과정으로 졸업 개인전을 10학점으로 진행하여야 하였는데 교내의 갤러리에서 하나의 외부적 도움이나 협력없이 개인전의 전 과정을 학생 스스로 꾸려나가야 했다. IMF 시절이었는데 내가 집중한 부분은 솔직히 오프닝이었다. 평소에 먹고싶었던 것들을 죄다 구비해놓고 누가 관객이고 누가 전시작가인지 구분가지 않을만큼 내내 먹고 마셨다. 그냥 즐겁고 싶었다. 그리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떤 작가 OR 사물에서 영감을 받았나요

영화, 책, 꿈, 경험 등의 모든 일상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인과의 관계를 가지고 ‘이유’를 가지고 발생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유’와 ‘메타포’를 찾으려 하곤 한다. 꿈속에서 무의식을 읽으려 하고, 일상의 헤프닝에서의 인과의 관계를 찾기를 희망하고, 영화나 책등의 다른이의 경험의 창작물을 통하여 배움을 구하고자 한다. 내 주위를 둘러싼 일상의 삶들이 숨은그림찾기나 퍼즐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작업에 열정을 주는 존재는 무엇인가요

기쁨이나 만족 보다는 고통과 결핍이지 싶다. 고통과 결핍은 어떤 상황에서조차 존재한다. 배가 부르면 부른대로의 두려움이 따른다. 이 만족과 행복이 언젠가 사라지거나 박탈될지도 모른다는, 혹은 이 행복이 어떻게 내게 주어진것인가에 대한 의구심, ‘아! 이렇게 배부르게 먹었으니 비만해지거나 섭취된 것들이 건강에 악영향을 줄수도 있겠구나’ 하는 불안. 가령 예를 들자면의 이야기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단지 모든 것이 하나의 단면만을 지니고 있는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충족되고 행복에 가득한 사랑조차도 그러하다.) 삶의 면면중에서 그러한 불안과 고통들이 사고를 활성화 시키곤 한다. 그것들이 고민케 해주고, 몸을 일으켜 그림앞에 앉아 스스로를 혹사하게 해준다.

작품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당신의 작품이 어떻게 비춰지기를 바라나요

개인적으로 교훈이나 감동 등을 주고 받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감정이나 사고가 상대방에게 강요되듯 주입되는것 역시 원치 않는다. 나는 나의 작업을 ‘말걸기’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통의 시도의 이유는 ‘위로와 위안’ 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령 “난 이러한데 당신은?” 이라는 나의 말걸기에 “응. 나도 그러한데 너도 그러하구나.” 를 통하여의 피차간의 위로와 위안이다.

20대 시절을 한 문장으로 표현 한다면

“바스러진 우주 먼지의 꿈”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찰라의 꿈은 내게서 영영 사라지지 않아.

작가님의 작품 속에서 사람의 얼굴을 주로 다루시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린시절의 나는 가벼운 난독을 가지고 있었더랬다. 난독의 특징은 납득을 통하여 ‘형태’적으로 무언가를 읽으려 하는데 있기도 하다. 나는 문자를 읽기 보다는 그것의 표정을 보려 하였다. 그것은 단지 문자에 머문것이 아니고, 동작, 표정, 모든 것들의 전반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나의 작업속에는 얼굴들과, 손들, 그리고 때론 ‘동작’들이 주를 이루어 등장하곤 한다. 이들의 표정이나 행위를 통하여 이야기를 한다.  나에게 있어 이들은 이미 다른 어떤 장치도 필요치 않을만큼의 충분한 요소들이 되어준다. 내가 작업을 통하여 하고자 하는것은 어차피 ‘인간들’의 이야기이고 얼굴은 그에 있어 가장 적절하고 충분한 주제가 되고 있다.

작가님의 작품활동에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은

특정의 사건을 꼽을 순 없다. 나의 작업은 끊어진적 없는 연결의 고리들을 가져오고 있다. 나는 전복이 아닌 진화를 꿈꾸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계기를 통하여 세상이 뒤집어 지듯 변화되는것이 아닌 고리고리를 이어온 진화를 꿈꾸며 그것이 내가 앞으로 가고자 하는 희망이기도 하다. 물론 삶에서의 무수한 사건들의 발생과 반복은 누구나의 삶에 있어서나 당연히 발생되는것들일 테다. 그것들이 요소요소 그 시기와 공간에 있어 나의 작업에 영향을 주어온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괴물이란

‘나’ 작업에 자화상이 대체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의 인물, 그러니까 박승예 라는 ‘나’ 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거울의 편린처럼 사용하고 있는것이라 할 수 있다. 거대한 거울에서 깨어져 나온 하나의 조각일 지언정 그것의 각도를 달리하면 세상을 죄다 그 안에 담아 비춰낼 수 있다는 생각이랄까. ‘나’는 당신이고 ‘당신’은 나다. 개개인적인 차이와 특성들은 물론 존재하나 괴물임에 있어서 우리들은 크게 다른 모습을, 이유를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두려움은 불안을 만들고 불안은 폭력에 당위성을 부여하며 우리는 그렇게 방어를 위한 공격을 가하는 괴물들이 되어있다. 오만은 스스로를 눈멀게 하고 때로 그것은 지극한 관용과 인정의 모습으로, 때로 그것은 이해와 수용의 모습으로, 때로 그것은 관대한 개입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기실에 있어서의 실체와는 정반대의 허울을 쓰고 등장하여 나를 위장하며 상대를 기만하기도 한다. 우리는 다양한 모습의 괴물을 다양한 ‘당연한’ 이유들로 만들어 내고 있다.

슬럼프가 있을 때에 어떻게 극복 하시나요

작업에 있어서의 슬럼프라는 것에는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작가라는 직업은 참으로 ‘편리’한 부분이 있어서 고통의 부분역시 잘 추렴하여 농축할 수록 외려 큰 계기를 부여해 줄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양 싶다. 보다는 삶에 있어서의 슬럼프라는것은 (굳이 슬럼프라는 표현이 적절한가 싶다.) 치명적이곤 하다. 극복의 방법과 노하우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것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냥 그래도 푹 괴로움에 젖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편이다. 그것 역시 선택이자 순응이라 생각한다. 나약하고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생각한다. 삶에 있어 일어나는 일들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각기의 대응의 방법에는 정답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최근의 관심사는

“Vanity” 최근까지는 두려움을 화두로 작업을 진행하여 왔다. 우리를 괴물로 만드는것의 요소들을 찾아왔는데 두려움의 다음의 스테이지를 오만으로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오만이라는것의 정의는 단순히 구해지지 않는듯 싶다. 오만은 무수한 모습으로 그것을 변형시켜서 왜곡하고 스스로를, 타인을 속이고 기만하곤 하는듯 하다.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에서 악마는 말한다. “오만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죄악‘ 이라고..

계획중인 프로젝트는

1월달에 갤러리 압생트에서 개인전을 마쳤다. 지난 4년간 3번의 기금을 받아 사용하여 왔었고, 6번의 개인전을 진행하였다. 올해는 국내에서의 개인전을 진행치 않을 계획이다. 3월경에 Sovereign art foundation의 Korean runners up 전시가 서울에서 진행되는데 이에 참여하게 된다. 이태리와 독일에서의 개인전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데 올해가 될런지 내년이 될런지는 나 스스로에게 달려있는 상황이다. 가만 보다가 하고싶은대로 할 계획이다.

작업 준비물 이외에 작업 할 때에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라디오나 티비를 꼭 켜놓는다. 그 내용에 집중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단지 무언가의 소리를(소음) 만들어 낸다.  내 작업에 있어서의 행위의 몰입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하기에 일정의 경계와 견제를 둔다. 과도하게 무의식속으로 몰입되는것을 툭툭 깨워줄 요소가 필요하다. 그것이 일련의 ‘소음’ 들이다. 그러하지 않으면 때론 너무도 괴로운 상태에 빠져도 깨워줄 요소가 없다.

살면서 가장 강력한 경험은

‘나’를 발견케 될 때다. 하나하나의 ‘사건’을 나열하는것은 개인적인 부분들이다. 어떤 계기나 사건을 통하여 몰랐던, 혹은 부정해왔던 나의 면면을 발견하거나 괴물로서의 나의 정체를 들어내 버리는것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 타인의 모습에서 괴물을 발견하는 순간은 크게 고통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스스로에게서 그것을 보게 될 때가 가장 아프다. 그 괴물이 내 스스로에게 상채기를 내고 타인에 아픔을 주거나 고통을 부여하는 실체임을 발견하는 순간이 무척 고통스럽다. 특별히 이야기 하자면 ‘사랑’ 이 그러한 듯 하다.

예술가에 있어 꼭 필요한 자질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예술가’로서의 자질은 모르겠다. ‘인간’으로서의 모습에 대한 생각을 해보곤 한다. 특정의 직업을 가진것은 그닥 중요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발현되는 모양과 도구와 행위가 다를뿐 근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닥 다를것들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인간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자질’ 이라는것이 있을까? 다시 돌아가서 굳이 ‘예술가로서의 자질’에 대하여 직업적인 각도에서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면 나역시 궁금한 부분이다. ‘일’함에 있어서 배워나가야 할 부분일테다. 또 다시 되돌아 가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자질, 이라기 보다는 자세에 대해서 스스로 갈구하는 부분이 있다라면 ‘구원’ 되고자 하는데 있어서의 절실함을 갖는것이 아닐까 싶다. 구원을 진정으로 깊게 열망한다면 그를 위한 삶의 자세를 갖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 하자면 예술가로서 살든 인간으로서 살든 열망하는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위한 삶의 자세를 제대로 갖추는것이 ‘자질’ 이지 않을까 싶다. 어, 이것은 질문에 대하여 좀 동문 서답이 된것일까?

아티스트로서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하고 싶은것을 하고 살고 있기에 그래도 이 척박하고 치사한 세상과 삶에 있어서는 제법 복받은 존재이구나 나는 하는 행운에 대한 일련의 안도와 민구스러움. 한마디로 “overwhelming gift”

자신이 정의하는 예술이란

‘이야기’ 하기,나누기.

앞으로의 꿈

사람이 되고 싶다. 생물학적 인간으로 태어났기에의 사람이 아닌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감에 있어서의 사람이 되고 싶다. 괴물로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털어가며 사람의 모습을 보다 갖춘 존재이고 싶다.

psy2

psy3

psy4

psy5

psy6

psy7

psy8

psy9

psy10

psy11

psy12

psy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