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th of a fragile beast (YongJoo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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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脫)프레임, 그 리얼리티한 저항의 시선

홍경한(미술평론가)

1. 최근 유독 관심 있게 본 영국 드라마가 있다. 바로 BBC 아메리카가 제작한 시리즈 <루터(Luther; 2011)>이다. 첫 회부터 시즌이 끝날 때까지 지속적 맥락은 지니고 있으나 사건의 발생부터 해결까지 매회 단편으로 마무리되며 넘어간다는 점, 소름 돋는 범인들의 악행이 눈을 감기도, 떼기도 힘들게 한다는 점에서 잠시 잠깐 킬링타임용으로 그만인 수사물이다. 특히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빠른 전개와 우리 사회 속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을 극의 근간으로 하기에 <루터>는 확실히 다른 형사물들과 변별력을 지닌다.

현재 시즌2까지 마무리된 <루터>의 여러 소주제 가운데 근래 시청한 마스크(mask) 살인범 이야기는 다소 인상적이다. 극중 살인범은 잔인한 방식으로 ‘묻지마 식’ 인명 살상을 자행하고, 그 방법 역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헌데 이 극에서의 주목성은 살인자체가 아니라 우리네 현실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과 범인의 경우 마스크(mask)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상심리자라는 데 있다. 사회적 열등의식과 그로인한 트라우마, 개인적 콤플렉스가 배타적 범죄의 원인이지만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범죄가 가능한 인물이라는 심리적 설정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사실 마스크는 간단히 말해 얼굴을 가리는 물건이다. 가스통 르루의 소설(1911년)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의 유령>에서 극중 주인공이 열등감의 원천인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한 것처럼 마스크는 원래 무언가를 덮기 위한 방어체이다. 그러나 사회적 관점에서의 마스크는 단지 외형을 ‘은폐’하는 장치로 국한되지 않는다. 마음 속 양심과 진실을 덮는 가림막이자, 자아와 본래의 원형 사이의 교환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의 변신을 가능하게 하는 유무형적 매개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그 유무형의 마스크가 우리사회 어디서든, 누구에게서든 쉽게 목도된다는 것, 그리고 인간 누구나 잠재적으로 그 보이지 않는 마스크를 하나의 상징처럼 착용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제로 우린 저마다의 삶의 환경이나 개인적 히스토리, 처해진 상황과 사건 앞에서 심리적, 외면적, 관계적 가면을 사용하고 그것이 실존을 지배하는 경향마저 인정하곤 한다. 본질이나 실재는 배경으로 물러난 채 소통에 있어 보이는 것(의식 혹은 인식-마스크-상징)에 초점을 두며 하나의 거대한 구성원의 집단인 사회가 요구하는 위장과 기호에 길들여진 채 살아간다. 이를 지젝(Zizek) 식 미학 용어로 ‘상징적 거세’라고 한다. 그리고 이 상징적 거세는 상징을 획득한 대신 실재를 거세당한 무기력한 인간 존재, 기호와 상징으로 치환된 ‘결핍된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루터>의 범인이나 <오페라의 유령>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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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스 마스크>를 작업의 주요 모티프로 해온 작가 하용주의 이전 작업들에서의 흥미로움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구현된다. 자발적이기 보단 강요에 의하거나 맹목적, 습속적 구조 아래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사회적 소통 수단으로서의 마스크는 그 자체로 변장과 위장(표정의 위장, 마음의 위장, 실존의 위장, 가치의 위장)을 지정하고, 인간 내면세계의 표현 뿐 아니라 그것을 쓰고 벗는 과정을 통해 외적 실체와 내적 실체를 직접적으로 규명한다. 그런 이유로 하용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던 마스크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상징이자, 소통에 있어 요구되는 필요불가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어 그 마스크는 더 이상 마스크자체의 용도에 국한되지 않는, 그것이 실재인 냥 인지되고 인식되는 것에 대한 작가 특유의 예술적 도구이며 동시에 하용주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비판적 설정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물론 마스크 연작에서의 그의 비판성은 완전히 노골적이진 않으나 그렇다고 우회적이지도 않다. 작품 저변에 부유하는 작가의 도발적 조형언어들은 콤플렉스와 정체성을 논하던 이전 작업에서도 엿보였지만 마스크 연작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양상을 드러내곤 했다.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저마다 착용하고 있는 가면에 대해 비교적 강약을 오가는 표현방식에 머물렀고 획일적인 세계,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형성하는 집단체제주의와 형식주의, 구성주의를 비판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하용주를 트렌드에 얽매인 채 얄팍한 그림에 종속되고 있는 여타 작가들과는 다른 변별력으로 작용했음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아트스페이스 H’에서 개최된 작품전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에서는 특유의 비판적 언어들이 더욱 짙고 확장되는 양태를 내보인다. 작가의 말처럼 속물적 인간 본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는가하면 집단의 법칙에 순응하지 못하는 부류들 그리고 집단의 소통방법을 따르는 듯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이기적 부류들에 대해 보다 예리한 눈길을 들이댄다. 이는 가히 마스크 연작에서 돌출하던 상징적 거세의 내적 확대이자 집단성을 요구하는 사회체계, 시스템에 대한 작가의식의 예민한 반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체계 및 시스템은 그에게 일종의 페르소나와 등치된다. 현실적인 개념으론 제도가 지닌 지독한 모순과 위장된 가식적 관계 속에서 유지되는 권력의 부당함과 부조리이지만 이를 분석 심리학적 테두리에서 해석하면 그건 분명 페르소나와 연결된다. 실제로 그의 그림들에 배어있는 페르소나는 특정한 집단에서 드러나는 행동규범, 인간의 사회적 역할에서 인정받기 위한 겉모습(표상)을 일반화한다. 특정 집단에서 매우 유효하기에 시장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제 색깔을 다하는 페르소나를 통해 다양성을 상실한 개인과 내적 실재가 희석됨을 넘어 그것이 가속되는 속박에 대한 우려를 지적한다.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하용주의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이다. 이 작품은 이전 작업을 토대로 페르소나에 적응하는 개인에 관한 눈길, 삶의 목표를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양식과 동일시하는 의존과 태도를 비롯한 현실에서 쉽게 마주하는 약자와 강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는 제도 및 획일적 공동체주의를 비판한다. 즉, 우리네 삶을 사회라는 단단한 거푸집과 이어놓을 경우 많은 이들이 자아실현의 어려움과 자책감, 소외감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페르소나의 팽창에 의한 속박과 굴레를 잉태한다는 것에 방점이 있다는 것이다. 전시자료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작가가 우리 현실을 “약육강식의 정글세계로 비유하며 인물들의 배치와 상황설정을 한 것”도 같은 연유이다.

하용주는 작품을 통해 획일화된 공동체주의란 평등을 중시하고 사회적인 발전을 촉진하며 그에 따른 권리와 책임, 옳고 그른 것 등의 가치판단을 중요하게 여기는 측면이 있으나 이것이 가중되면 집단주의, 체제순응주의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일정한 선을 넘어설 경우 되레 평등은 약화되고 개인과 집단에 대한 차별이 불거지며 집단이기주의,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등의 폐단을 잉태한다고 일갈한다. 나아가 그는 궁극적으로 한 사회에서 개인적 가치가 하락하면 할수록 그 개인은 권력(지배층)에 종속되고 항거하지 못하는 유약한 존재로 남는다며 사회가 요구하는 노예화에 대한 고찰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이러한 주장을 강하게 담고 있는 것이 앞서도 설명한 대형작품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이다. 각각 붉고 무채색에 가까운 색깔을 지닌 두 개의 커다랗고 네모난 건축물이 등장하고 일단의 (우산을 쓰고 있거나 우산이 바람에 날리거나 구타를 당하고 있거나 무언가를 덮은 채 누워있는, 그러나 한편에선 멍하게 서 있거나 청소를 하거나 하는)무리들이 저마다 각기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회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옮겨와 이미지화 하고 있다. 여기서 화면의 많은 부분을 파지하고 있는 건물은 답답해하는 작가의 심정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 건물은 기득권을 지닌 거대 권력을 상징하며 건물에 비해 작게 그려진 인물들은 개성 없이 사회가 원하는 시스템에 종속된 채 살아가고 있는 무기력하고 활기를 잃은 피지배층을 지정한다.(그런 이유로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눈을 가리고 있다. 이는 증발해버린 주체성과 당장의 앞에 것에 집중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지칭한다.)

이 작품화면 우측에 수북이 쌓인 군상들은 간혹 대항하는 소수와 그들 안에서의 기득을 선점하기 위해 집단 구타를 행하는 무리들의 잔여물로써, 생물학적 죽음이라기 보단 사회적 죽음을 맞이하며 기득에 순응하는 무리들, 그것을 덤덤하게 혹은 무관심하게 시체를 쓸어 담고 있는 현실적 상황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는 있으나 정작 깊게 들여다보면 사회라는 곳은 상당히 잔인할 뿐만 아니라 충격적인 상황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주문하는 체제에 대한 맹목적 종속은 일차적으로 자주성을 잃은 상태를 고지한다. 자주성이 없다는 건 그것이 설사 부당할지라도 지배층이 생산하는 프레임에 갇힌 채 스스로의 가치관을 피력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독립적, 주관적 가치관을 잃어버린 개인은 시스템이 요구하는 희생에 유구무언하게 되며 비(非)이타적 사고의 형성으로 인한 안일한 이기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당장의 현실에 안주하길 원하고 때론 비양심적으로 회피하며 편향성을 갖기도 한다. 간혹 이뤄지는 저항이라는 것도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한 저항이기 일쑤이며 각기 다른 가치의 집단들의 대립일 가능성이 높다. 작가 하용주는 바로 이런 상황에 내재된 이야기를 전시 주제를 나타내는 작품이자 대표작품인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에 아주 솔직하고 직접적 언어로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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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외에도 2008년 ‘정미소’ 개인전 이후 4년여 만에 선보인 하용주의 근작들은 이전 작업 대비 확실히 날카롭다는 특징을 갖는다. 강렬한 색깔, 격정적인 듯 보이지만 차분한 구도에서 일견 차갑다는 인상마저 심어준다. 그러나 그 내부엔 직시해야할 ‘오늘’이 놓여있다. 우리가 알고도 말하지 않는 혹은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거론하는 비평적 시각이 이입되어 있으며, 애써 돌아가지 않는 방식으로 피지배층에 대한 속내를 꺼내놓고 있다.

사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여타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연작 <배우지 못한 해답>도 매한가지다. 이 작품은 어려서부터 사회의 일원으로 강요받는 현실을 도상화 하고 있다.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듯 벽돌을 축적하고 있는 이미지와 그 벽돌무더기가 무너진 이미지로 각각 작품화된 이 그림은 어쩌면 버림받은 태초의 순수와 참다운 인간가치의 상실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사회적 행동규범(동일성을 강조하는 페르소나) 아래 자유로운 사고를 제약 당하는 작금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유의미한 건, 분명 보이지 않는 틀(frame)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서 개인이 추구해야할 삶의 유무형적 가치와 진정한 인간 구현이란 과연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지 되묻는다는 것에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가운데 <퇴화 하는 형식>과 <외줄타기>, <Buring ladies>, <Siren> 등의 작품은 얼굴이라는 모티프는 동일하지만 이전 작품에 수없이 등장하던 마스크가 아닌 ‘불’을 소제로 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불이 활활 타오르거나 흘러내리며 터져나가는 이미지들은 “그동안 사회적 소통 도구인 심리적 가스 마스크가 벗겨진 가변적 정서를 대리한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에 ‘불’은 보이고 싶은 나와 숨기고 싶은 나, 진정성을 지닌 나와 거짓(위장된)으로 꾸며진 나의 확장형이다. 그것은 그의 회화방식의 전개에 있어 이전 ‘가스 마스크’의 연장이기도 하나, 한편으론 작가 시선 변화의 확대랄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선 정체성의 상실 및 정신적인 갈등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네 초상에 관한 냉소적 지정이며 나아가 작가 개인에겐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깊이 획득과 성숙미의 발현이라 해도 그르지 않다. 물론 이것이 그의 근작들과 옛 작업과의 구분점이요, 그의 근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밖에도 <잉여인간> 시리즈 가운데 머리 대신 꽃 이미지가 합성된 작품은 사회체계가 각각의 구성원들을 바라보는 상징적 시선, 기호화된 시선들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낙지처럼 여러 개의 발과 문어의 촉수를 가진 인간이 등장하는 작품은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제도적 시스템에 의해 하나의 괴물로 뒤바뀌는 현상을 상징하며(실제로 우리사회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붉은 화면에 한쪽 다리가 묶인 채 거꾸로 들려진 여성이 그려진 작품은 외적 억압과 강요에 의해 정작 내보이지 않아도 될 것들을 공개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초상을 대신한다. 특히 인간 욕망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Buring ladies>는 동일한 트렌드(비개성적인 위장적 유행)에 함몰된 채 그것에 길들여지고 있는 비개성적인 현상을 예리하게 투사한 작품이다.(어그부츠가 유행이면 누구나 어그부츠를 신는다. 극사실주의나 팝아트가 유행하면 전시장은 죄다 사실적 묘사의 과일과 캐릭터열전으로 채워진다. 이들의 비개성적인 결과들은 결국 같은 콘텍스트를 함유한다.)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모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전반적인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상징적 거세로 이뤄진 실존의 참뜻을 헤아린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 존중이라는 이념을 모태로 한 민주주의의 아이러니를 되뇌고, 갈수록 노골화되는 자본주의 폐단과 그 폐단 속에서 소외 및 노예화 되어가는 인간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 특히 국가와 집단, 심지어 개인을 위한다는 단체마저 합리적, 보편적 질서를 위장해 자행하는 다양한 권력적, 폭압적 양태에 대해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하용주는 이를 과거 작품에서완 달리 다소 억누르고 있던 감정선을 해제한 후 최대한 분출하고 있다. 짜릿하게 전개하고 있다. 한편 필자는 그의 근작들에서 우리 시대 예술이 무엇을 그리고 말해야 하는지를 본다. 탈(脫)프레임, 그 리얼리티한 저항의 시선을 엿보고 예술의 역할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자문하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자문에 상응하는 적절한 답을 제시하려 하는 하용주의 작업은 그래서 의미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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